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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 공부
한시 해설 · 6장 · 2026-10-21 갱신

한국의 한시

삼국·통일신라부터 고려·조선·개항기에 이르는 한국 한시의 역사적 전개와 시화·시론, 계층별 확장, 그리고 중국 시와의 차이를 살핀다.

삼국·통일신라·발해: 초기 전승과 동아시아 문단의 교류

삼국의 한시 전승과 을지문덕의 오언시

한국 한시(漢詩)는 한국인이 한문(漢文)이라는 동아시아 공통 문어를 시적 언어로 삼아 한국의 자연과 역사, 사회와 내면을 기록해 온 시 문학 전통이다 [S02, S03]. 한자가 한반도에 전래된 시기부터 삼국시대 지식인들은 외교 문서와 금석문, 역사 기록은 물론 시가를 짓는 데에도 한문을 활용했다 [S02, S03]. 다만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시대의 한시 자료는 전란과 세월 속에서 대부분 인멸되고, 후대에 편찬된 사서(史書)와 시문 선집에 일부 작품만 남아 있다 [S02, S03].

현전하는 문헌 기록에서 작자와 창작 배경이 구체적인 한시 원문으로 전하는 이른 사례는 고구려 장수 을지문덕(乙支文德)이 수(隋)나라 장수 우중문(于仲文)에게 보냈다는 오언 네 구의 시다 [S20]. 『삼국사기(三國史記)』 권44 열전에는 별도 제목 없이 “문덕이 중문에게 시를 보냈다(文德遺仲文詩曰)”고 기록되어 있고, 조선 전기 『동문선(東文選)』[S114] 권19 및 한시나루 카탈로그에서는 「증수우익위대장군우중문(贈隋右翊衛大將軍于仲文)」이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S20, S104].

神策究天文,妙算窮地理。戰勝功旣高,知足願云止。 — 『三國史記』 卷44 「乙支文德」 [S20]

“신묘한 계책은 하늘의 무늬를 다 헤아렸고, 오묘한 산술은 땅의 이치를 끝까지 궁구하였네. 싸움에 이겨 공이 이미 높아졌으니, 만족할 줄 알아 이만 그치기를 바라노라.” [S20] 제1·2구에서 ‘신책(神策)’과 ‘묘산(妙算)’, ‘구천문(究天文)’과 ‘궁지리(窮地理)’를 나란히 맞세워 상대 장수의 지략을 치켜세우는 듯하면서도, 제3·4구에서 『노자(老子)』 44장의 ‘지족불욕(知足不辱,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음)’을 떠올리게 하며 퇴각을 요구하는 고도의 외교적·군사적 기지를 보여 준다 [S20, FC02]. 앞서 한시와 근체시에서 짚었듯, 이 시의 역사적 배경은 612년(영양왕 23) 살수(薩水) 전투 전후이지만 당대에 편찬된 『수서(隋書)』 권60 「우중문전」과 김부식(金富軾) 등이 고려 인종 23년(1145)에 편찬을 마친 『삼국사기』에 원문이 전하므로, 이를 ‘한국 한시의 절대적 최초작’으로 단정하기보다 현전 문헌상 가장 이른 시기에 전하는 작품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S20, S89, FC01].

통일신라 말의 도당 유학과 최치원, 그리고 발해 한시의 기록

통일신라 중·후기에 이르면 당(唐)나라와의 문물 교류가 깊어지면서 당에 건너가 학문을 닦는 도당(渡唐) 유학생과 구법승이 크게 늘어났다 [S03, S24]. 그 가운데 외국 출신 유학생을 대상으로 한 당나라 과거인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해 급제한 문인들이 배출되었는데, 이를 대표하는 인물이 신라 말의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사망 연도 미상, 자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다 [S03, S24].

최치원은 열두 살이던 868년(경문왕 8) 당나라에 유학하여 874년 빈공과 진사시에 급제했고, 당에서 선주 율수(溧水) 현위와 고병(高騈)의 종사관 등을 지내며 당대 중국 문단과 직접 호흡했다 [S24]. 그가 885년(헌강왕 11) 신라로 돌아온 뒤 재당 시기에 지은 표·장·서·계와 시편들을 모아 886년(헌강왕 12)에 헌강왕에게 바친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은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한국 개인 문집 가운데 가장 이른 문헌이다 [S03, S24, FC03]. 다만 최치원처럼 빈공과에 급제해 당의 관직을 지내고 방대한 개인 문집을 남긴 사례는 당대 유학생 가운데서도 특출한 경우이므로, 이를 모든 도당 유학생의 보편적 이력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된다 [S24].

최치원의 한시는 『계원필경집』 외에도 『동문선』 등에 흩어져 전하는데, 『동문선』 권19에 실린 오언절구 「추야우중(秋夜雨中)」과 권4에 실린 오언고시 「우흥(寓興)」은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지식인의 고독을 보여 주는 대표작이다 [S104, FC04].

秋風惟苦吟,擧世少知音。窓外三更雨,燈前萬古心。 — 崔致遠, 「秋夜雨中」, 『孤雲集』 卷一 [FC07]

“가을바람 속에 오직 괴로이 시를 읊조리나니, 온 세상에 내 소리 알아주는 이(지음·知音)가 드물구나. 창밖에는 삼경의 밤비가 내리고, 등불 앞에는 만고의 아득한 마음이여.” [FC07] 이 인용은 『고운집(孤雲集)』 권1 전사본을 따랐으며, 『동문선』 권19 전사본은 마지막 구를 ‘燈前萬里心’으로 싣는다. 당나라 말기의 혼란과 육두품(六頭品) 신분제에 가로막힌 신라 사회 사이에서 느낀 내면의 고립감을 스무 글자 오언절구의 정제된 대우(3·4구 ‘창외삼경우 / 등전만고심’)로 응축했다 [S24, S104].

한편 남쪽의 통일신라와 나란히 북방에서 남북국 시대를 이룬 발해(渤海)에서도 왕족과 귀족 문인들이 수준 높은 한시를 창작했다 [S03]. 양태사(楊泰師)·왕효렴(王孝廉)·인정(仁貞) 등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남긴 시편들이 일본 측 한시집(『경국집』·『문화수려집』 등)에 전해지고 일부 금석문과 후대 문헌 기록이 남아 있으나, 발해 본토의 문집과 사서가 인멸되어 남아 있는 자료의 범위가 좁기 때문에 발해 한시 전체의 흐름을 온전히 재구하기에는 사료적 한계가 있다 [S03].


고려의 한시: 과거 제술업과 시화·서사시의 성취

과거제 제술업과 정지상의 서정

고려시대에 들어 한시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가장 큰 제도적 동력은 광종 9년(958) 후주(後周) 출신 쌍기(雙冀)의 건의를 받아들여 시행한 과거제(科擧制)였다 [S03, S92]. 고려의 문신 선발 시험은 유교 경전의 이해를 묻는 명경업(明經業)과 문학·문장 창작 능력을 시험하는 제술업(製述業, 진사과)으로 나뉘었는데, 실제 관료 사회에서 훨씬 높은 위상을 차지한 것은 시(詩)·부(賦)·송(頌)·책(策)을 시험하는 제술업이었다 [S90, S92].

고려 과거의 시험 기록을 보면 예비 시험과 본시험(예부시·동당시)의 단계마다 오언 육운시(六韻詩, 12구 배율)·십운시(十韻詩, 20구 배율) 등 엄격한 격률을 요구하는 시부 과목이 부과되었다 [S90, S92]. 과거에 급제한 문인들은 한림원(翰林院)과 보문각 등 문한(文翰) 관서에 나아가 왕명의 제찬과 외교 문서를 맡았으므로, 고려 사대부에게 한시 창작은 개인의 정서 표현이자 관료로서의 핵심 역량이었다 [S03, S90, S92].

고려 전기·중기를 거치며 축적된 서정시의 성취를 대표하는 시인이 서경(西京, 평양) 출신의 정지상(鄭知常, 출생 연도 미상–1135)이다 [S128]. 1114년(예종 9) 과거에 급제하고 1135년(인종 13) 묘청(妙淸)의 난이 일어났을 때 김부식에게 처형된 그는, 만당풍의 맑고도 애절한 절구와 율시로 고려 시단에 깊은 자취를 남겼다 [S128]. 강변 정자의 청아한 밤풍경을 그린 칠언율시 「장원정(長源亭)」과 함께, 『동문선』 권9에 수록된 오언율시 「송인(送人)」(흔히 칠언절구 「대동강」이 「송인」으로도 불리나, 『동문선』 권9에 실린 아래 작품은 가을날의 이별을 읊은 오언율시다)이 그의 빼어난 조어 감각을 보여 준다 [S125, S128].

庭前一葉落,床下百虫悲。忽忽不可止,悠悠何所之。 — 鄭知常, 「送人」, 『東文選』 卷九 [S125]

“뜰 앞에 나뭇잎 하나 떨어지고, 평상 아래 온갖 풀벌레가 슬피 우네. 망연한 마음을 그칠 길 없으니, 아득히 먼 길 어디로 가려는가.” [S125] 첫 연부터 잎 하나(一葉)의 낙하와 백 마리 벌레(百虫)의 울음을 맞세워 이별의 계절감을 선명하게 환기한다 [S125].

무신집권기 문단과 이인로·이규보·최자의 시화 전통

1170년 무신정변을 계기로 문벌 귀족 사회가 흔들리고 신진 사대부들이 등장하면서, 고려 한시는 시풍의 다변화와 함께 시에 관한 비평·일화를 모은 ‘시화(詩話)’ 문학의 성립을 맞이했다 [S23, S87, S116].

무신집권기 죽림고회(竹林高會) 문인들을 대표하는 이인로(李仁老, 1152–1220, 자 미수·眉叟, 호 쌍명재·雙明齋)는 당·송 시, 특히 소식과 황정견(강서시파)의 시법을 깊이 연구해 정련된 시편(예: 오언절구 「산거(山居)」)을 남겼으며, 한국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破閑集)』 상·중·하 3권(83조)을 저술했다 [S23, S117]. 『파한집』은 이인로가 세상을 떠난 뒤인 1260년(원종 1) 3월에 안렴사 대원왕공의 후원으로 처음 간행되었는데(초간본은 현전하지 않고 1659년 중간된 목판본이 전한다), 권말에 붙은 발문(跋文)은 그 편찬과 간행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S23, S107].

命取雜文三百餘首,破閑集三卷。 — 『破閑集』 跋 [S107]

이인로의 뒤를 이은 문인 최자(崔滋, 1188–1260)는 최우(崔瑀)의 명을 받아 『파한집』에서 빠진 고려 고금의 시평과 일화를 보충하여, 『파한집』 초간보다 6년 앞선 1254년(고종 41)에 『보한집(補閑集)』 상·중·하 3권을 간행했다 [S108, S116].

李學士仁老略集成篇,命曰破閑。 — 崔滋, 『補閑集』 卷上 [S108]

“이학사 인로가 대략 모아 편을 이루고 이름을 『파한』이라 하였다.” [S108] 『파한집』과 『보한집』의 간행으로 고려 시단은 중국 시의 수용을 넘어 자국 시인들의 작품을 비평하고 계보를 정리하는 독자적인 시학의 거울을 갖게 되었다 [S23, S87, S116].

이 시기 또 한 사람의 거장이 이규보(李奎報, 1168–1241, 자 춘경·春卿, 호 백운거사·白雲居士)다 [S126]. 그의 방대한 시문은 임종 해인 1241년(고종 28)에 문인 이수(李需)가 쓴 「동국이상국전집서(東國李相國前集序)」(전집 41권 편차 기록)와 1251년 중간본 계열인 『동국이상국전집(東國李相國全集)』을 통해 온전히 전한다 [S105, S106].

分為四十一卷,號曰《東國李相國文集》。 — 李需, 「東國李相國前集序」 [S105]

이규보는 스물여섯 살이던 계축년(1193, 명종 23) 4월에 옛 『삼국사(舊三國史)』의 「동명왕본기」를 얻어 읽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주몽)의 건국 사적을 282구의 장편 오언고시로 읊은 영사 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동국이상국전집』 권3 수록)을 지었다 [S106]. 그는 서문에서 처음에는 동명왕의 사적을 귀신이나 환술처럼 여겼으나 거듭 읽으며 그것이 나라를 세운 성스럽고 신령한 자취임을 깨달았다고 밝혔다 [S106].

非幻也,乃聖也;非鬼也,乃神也。 — 李奎報, 「東明王篇幷序」, 『東國李相國全集』 卷三 [S106]

“환술이 아니라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라 신령함이다.” [S106] 이규보는 이러한 민족사적 장편 서사시뿐 아니라, 강변의 새벽비를 그린 칠언절구 「강상효우(江上曉雨)」나 산사의 스님이 우물 속 달빛까지 병에 길어 온다는 기발한 착상의 오언절구 「산석영정중월 기이(山夕詠井中月 其二)」처럼 자유분방한 상상력의 단편들도 남겼다 [S126].

흔히 문학사에서는 이인로를 고전 전고의 활용을 중시한 ‘용사론(用事論)’의 대표자로, 이규보를 옛사람의 말을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뜻을 창출하는 ‘신의론(新意論)’의 대표자로 맞세우곤 한다 [S23, S87]. 그러나 실제 두 사람의 시론과 작품을 살펴보면 이인로 역시 시어의 생동감과 기상을 강조했고 이규보 또한 누구보다 풍부한 전고를 자유자재로 구사했으므로, 두 시인을 상호 배타적인 양극단으로 단순화하지 않고 고려 한시의 표현 영역을 함께 넓힌 두 축으로 이해해야 한다 [S23, S87, S126].

고려 후기의 시단과 이제현의 소악부

원(元)나라와의 교류가 깊어진 고려 후기에는 성리학의 수용과 함께 시단에서도 새로운 안목이 열렸다 [S02, S127]. 이 시기를 대표하는 이제현(李齊賢, 1287–1367, 자 중사, 호 익재·益齋)은 원나라의 수도 연경(베이징)과 강남을 오가며 조맹부(趙孟頫)·원명선 등 당대 중국 문인들과 교유했고, 시문집 『익재집(益齋集)』과 시화·패설집 『역옹패설(櫟翁稗說)』을 남겼다 [S127].

이제현은 원숙한 구성과 품격을 갖춘 근체시(예: 오언율시 연작 「제장안역려(題長安逆旅)」)에서 당대 최고봉으로 꼽혔을 뿐 아니라, 당시 민간에서 우리말로 불리던 고려속요를 칠언절구 열한 수로 옮긴 「소악부(小樂府)」를 창작했다 [S02, S127]. 우리말 노래의 정서와 풍속을 한시의 절구 형식 안에 담아낸 이제현의 「소악부」는 조선 후기까지 이어지는 한국 악부시(해동악부·소악부) 전통의 효시가 되었다 [S02, S127].


조선 전·중기의 한시: 국가 문헌의 정비와 당풍으로의 전환

서거정의 『동문선』·『동인시화』와 김시습의 방외 문학

조선 건국 이후 15세기 성종 대에 이르면, 국가적 문운의 융성 속에서 삼국 이래의 한국 한문학 유산을 정리하고 그 독자적 위상을 확립하려는 편찬 사업이 대대적으로 추진되었다 [S25, S114, S115]. 그 중심에 선 인물이 관학파의 거두 서거정(徐居正, 1420–1488, 자 강중, 호 사가정·四佳亭; 작품 「송도회고(松都懷古)」 등)이다 [S25].

서거정은 먼저 1474년(성종 5)에 신라의 최치원부터 고려·조선 초 문인들의 시에 관한 비평과 일화 143편을 모은 시화집 『동인시화(東人詩話)』 상·하 2권을 편찬했다(현전 판본으로는 1664년 경주부 중간본 등이 전한다) [S25, S115]. 『파한집』·『보한집』이 시화 외에 잡록적 성격을 겸했던 것과 달리 오로지 시 비평에만 집중한 전문 시화서로서, 문신 강희맹(姜希孟)은 『사숙재집(私淑齋集)』 권8에 수록된 「동인시화서(東人詩話序)」에서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S109, S115].

吾東方詩學大盛,作者往往自成一家。 — 姜希孟, 「東人詩話序」, 『私淑齋集』 卷八 [S109]

“우리 동방의 시학이 크게 성하여, 시를 짓는 이들이 왕왕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었다.” [S109] 이어 1478년(성종 9)에는 성종의 명을 받아 서거정을 중심으로 23명의 찬집관이 신라·고려·조선 전기 작가 500여 명의 시문 약 4,302편을 가려 뽑은 총 133권 45책(목록 3권 포함)의 역대 시문 선집 『동문선(東文選)』을 초간했다 [S114]. 서거정이 쓴 「동문선서(東文選序)」의 한 대목은 한국 한문학을 바라보는 자주적 인식을 선명하게 보여 준다 [S124].

是則我東方之文,非宋元之文,亦非漢唐之文,而乃我國之文也。 — 徐居正, 「東文選序」 [S124]

“우리 동방의 글은 송·원의 글도 아니요 한·당의 글도 아니며, 바로 우리나라의 글(我國之文)이다.” [S124] 같은 한문을 쓰더라도 그 속에 담긴 제도와 풍토, 역사의 결이 다르므로 한국 한문학은 중국 특정 시대의 부속물이 아닌 독자적 문학이라는 선언이다 [S25, S114, S124].

한편 조정의 관학 문단 바깥에서는 세조의 왕위 찬탈에 분개해 승려가 되어 전국을 유랑한 방외인(方外人) 문학의 대표자 김시습(金時習, 1435–1493, 자 열경, 호 매월당·梅月堂)이 『금오신화(金鰲新話)』와 『매월당집(梅月堂集)』을 남겼다 [S02, S129]. 그의 오언율시 「숙산촌(宿山村)」(“雨歇千山暮,煙生碧樹間”) 등이 보여 주듯, 김시습의 한시는 권력의 중심에서 벗어난 지식인의 고뇌와 자연 속의 쓸쓸한 서정을 깊이 있게 담아냈다 [S129]. 아울러 16세기 초 연산군·중종 대에는 박은(朴誾)·이행(李荇)·김안로 등이 황정견과 강서시파의 시법을 창의적으로 소화하여 후대에 ‘해동강서파(海東江西派)’라 불리는 높은 시적 성취를 이루었다 [S101].

삼당시인과 목릉성세, 그리고 여성 시인의 목소리

16세기 중·후반 선조(宣祖, 능호 목릉·穆陵) 대에 이르면 조선 시단은 문학사에서 ‘목릉성세(穆陵盛世)’라 부르는 전성기를 맞이하며 시풍의 큰 전환을 겪는다 [S02, S04, S102]. 고려 후기 이래 문단을 지배해 온 소식·황정견 중심의 송시풍(지성적 의론과 까다로운 전고 활용)을 비판하고, 감정의 자연스러운 유로와 음율의 청아한 울림을 중시하는 당시풍(唐詩風)을 배우자는 흐름이 일어난 것이다 [S02, S04].

이 당시풍 전환의 선두에 선 인물들이 1572년(선조 5) 무렵 호남에서 시사를 맺고 교유하며 ‘삼당시인(三唐詩人)’이라 불린 최경창·백광훈·이달 세 사람이다 [S04, S94, S130, S131].

  • 최경창(崔慶昌, 1539–1583): 자는 가운(嘉運), 호는 고죽(孤竹)이며 『고죽유고(孤竹遺稿)』를 남겼다 [S94]. 맑고도 절절한 절구에 능했으며 사이트에서는 오언절구 「삼청동구점(三淸洞口占)」 등을 읽을 수 있다 [S94].
  • 백광훈(白光勳, 1537–1582):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峯)이며 『옥봉시집(玉峯詩集)』이 전한다 [S131]. 전조(고려)의 옛 절터를 지나며 회고의 정을 읊은 오언절구 「홍경사(弘慶寺)」(“秋草前朝寺,殘碑學士文”)처럼 군더더기 없는 당풍 절구의 정수를 보여 주었다 [S131].
  • 이달(李達, 생몰 미상):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이다 [S130]. 관기(官妓)의 아들로 태어난 서얼 신분 때문에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고 평생 유랑했으나, 고시와 악부, 근체시 전반에서 삼당시인 가운데서도 가장 원숙한 성취를 이룬 인물로 꼽힌다(대표작 예: 「채릉곡(采菱曲)」) [S04, S130].

이와 함께 목릉 시단에서는 이안눌(李安訥)과 더불어 ‘이재(二才)’로 일컬어진 권필(權韠, 1569–1612, 자 여장, 호 석주·石洲; 1612년 광해군 대 김직재의 옥에 연루되어 유배길에 44세로 사망 [S102])이 날카로운 사회 풍자시(「투구행(鬪狗行)」)와 유려한 서정시(「춘궁사(春宮詞)」)를 남겼고, 이수광(李睟光, 1563–1628)은 1614년에 편찬한 『지봉유설(芝峯類說)』의 「문장부(文章部)」를 통해 한국과 중국의 역대 시문을 폭넓게 비평했다 [S102, S118].

더불어 16세기 중·후반에는 사대부 남성 중심의 문단 지형 속에서 여성 시인들의 목소리가 또렷한 문학적 성취로 남았다 [S15, S17, S28].

  1.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본명 초희): 강릉 출신 명문가에서 태어나 아우 허균(許筠)과 함께 이달에게 시를 배웠다 [S15]. 스물일곱 짧은 생을 마친 뒤 허균이 유고를 수습해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 등에게 전하여 1606년 중국에서 먼저 시집이 간행되었고, 1608년(광해군 즉위년) 4월 허균이 국내에서 간행한 목판본 『난설헌집(蘭雪軒集)』에 도교적 선계를 노래한 「유선사(遊仙詞)」 87수를 비롯한 작품들이 수록되었다 [S15, S132]. 섬세한 감각의 오언절구 「춘우(春雨)」와 가난한 여인의 애환을 그린 오언절구 「빈녀음 기일(貧女吟 其一)」이 대표작이다 [S15].
  2. 이옥봉(李玉峯, 생몰 미상): 군수 이봉지(李逢之)의 서녀이자 문신 조원(趙瑗)의 소실로, 후손 조정만(趙正萬)이 1704년(숙종 30)에 간행한 『가림세고(嘉林世稿)』 부록 『옥봉집(玉峯集)』 계열에 32편의 한시가 전한다 [S28]. 가을밤의 외로움을 읊은 칠언절구 「추한(秋恨)」과 오언절구 「규정(閨情)」(“有約郎何晚,庭梅欲謝時”)은 당풍 절구의 단아한 기품을 보여 준다 [S28, S29].
  3. 황진이(黃眞伊, 16세기 활동, 생몰 미상): 개성 기녀 출신으로 시조와 함께 「봉별소양곡(奉別蘇陽谷)」·「만월대회고(滿月臺懷古)」 등의 한시가 전한다 [S17]. 다만 황진이에 관해서는 당대의 직접적인 정사·문집 기록이 없고 후대 문인들의 시화와 야사(野史) 전승을 통해 전기와 작품이 채록되었으므로, 출생이나 연애에 얽힌 설화적 일화와 검증 가능한 문헌 기록을 구분해 읽어야 한다 [S17].

조선 후기와 근대 전환기: 조선풍의 자각과 문단의 확장

천기론·성령론과 실학파·사가시인의 등장

양란(임진왜란·병자호란)을 겪은 뒤 17세기 후반부터 19세기에 이르는 조선 후기 한시사는 두 가지 큰 흐름으로 요약된다. 하나는 중국 시의 모방을 벗어나 조선의 현실과 진솔한 개성을 담으려는 시론의 발전이고, 다른 하나는 사대부를 넘어 서얼·중인(여항인)으로 창작 계층이 넓어진 문단의 확장이다 [S02, S26, S37].

시론에서는 먼저 17세기 말~18세기 초 김창흡(金昌翕, 1653–1722, 호 삼연·三淵) 등을 중심으로 ‘천기론(天機論)’이 제기되었다 [S26, S27]. 천기론은 옛사람의 시구를 본뜨는 인위적 기교 대신, 사물과 마주했을 때 마음속에서 저절로 움직이는 자연스러운 생동감(천기·天機)과 참된 감정을 중시하는 논의로, 신분과 학식의 고하를 떠나 진실한 정서가 시의 본령이라는 인식을 확산시켰다(다만 천기론의 이론적 체계성과 범위에 관해서는 연구자마다 해석의 결이 조금씩 다르다) [S26, S27].

18세기 후반 정조(正祖) 대에는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자고 주장한 북학파(北學派)의 거두 박지원(朴趾源, 1737–1805, 호 연암·燕巖, 『열하일기(熱河日記)』 저술 [S30])과 교유한 젊은 문인들이 청대 성령설(性靈說) 등과 공명하며 참신한 시풍을 열었다 [S21, S22, S30, S50]. 특히 서울 백탑(원각사지 십층석탑) 인근에서 교유한 이덕무(李德懋, 1741–1793, 작품 「논시(論詩)」·「추안(秋雁)」)·유득공(柳得恭, 1748–1807)·박제가(朴齊家, 1750–1805)·이서구(李書九, 1754–1825) 네 사람의 시를 유득공의 숙부 유금(柳琴)이 모아 연경에 가져갔고, 1777년(정조 1) 중국 학자 이조원(李調元)·반정균(潘庭筠)의 서문과 비평을 붙여 중국에서 간행한 시집이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다 [S21, S22, S36]. 이 시집을 통해 네 사람은 중국과 조선 문단에 ‘사가시인(四家詩人, 한객사가)’으로 널리 이름을 알렸다 [S21, S22, S36].

이어 실학을 집대성한 정약용(丁若鏞, 1762–1836, 호 다산·茶山)은 두보의 사회시와 백거이의 신악부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우리나라의 산천과 풍속, 제도를 읊어야 한다”는 조선시(朝鮮詩) 의식을 실천했다 [S02, S32]. 막걸리를 마시고 도리깨질을 하며 보리를 타작하는 농민들의 역동적인 노동을 칠언고시로 그려 낸 「타맥행(打麥行)」(“新篘濁酒如湩白,大碗麥飯高一尺”)과, 유배지 강진(탐진) 농어촌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일곱 자 절구 연작으로 기록한 「탐진촌요 기일(耽津村謠 其一)」은 조선 후기 현실주의 한시의 백미로 꼽힌다 [S32].

여항문학의 성장과 신위·김정희·황현으로 이어진 말기 한시

조선 후기 한시사의 또 다른 중요한 축은 역관(譯官)·의관·서리(胥吏)·군교 등 중인(中人)과 서얼 계층이 주도한 여항문학(閭巷文學, 또는 위항문학·委巷文學)의 성장이다 [S37]. 17세기에 형성되기 시작한 여항 문단은 18세기 후반 천수경·장혼·조수삼 등이 인왕산 기슭에서 결성한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와 『소대풍요(昭代風謠)』·『풍요속선(風謠續選)』 같은 공동 시집 편찬을 통해 19세기까지 한시 창작의 주체로 당당히 자리 잡았다 [S37].

19세기 사대부 시단에서는 신위(申緯, 1769–1847, 호 자하·紫霞)와 김정희(金正喜, 1786–1856, 호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가 문풍을 이끌었다 [S31, S33]. 신위는 고려 이제현의 전통을 이은 「소악부(小樂府)」 마흔 수와 한국 시사를 칠언절구로 비평한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서른다섯 수, 조선 후기 연희 문화를 담은 「관극절구(觀劇絶句)」 등을 남겨 자국 문화와 시사 비평을 한시로 집약했다 [S33]. 김정희는 연경의 옹방강(翁方綱)·완원(阮元) 등 청대 고증학자·문인들과 깊이 교유하며 금석학(金石學)과 서화, 경학적 지식을 시에 녹여 낸 학자풍의 시 세계를 구축했다 [S31].

개항기와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천여 년 이어진 한시 전통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시인이 구례의 처사 황현(黃玹, 1855–1910, 자 운경, 호 매천·梅泉)이다 [S119]. 그는 신위의 시풍을 이으면서도 외세의 침탈과 부패한 조정을 통렬히 기록한 『매천야록(梅泉野錄)』과 『매천시집(梅泉詩集)』을 남겼고, 1910년 경술국치의 소식을 듣고 아편을 마신 뒤 칠언절구 네 수로 이루어진 「절명시 사수(絶命詩 四首)」를 남기고 순절했다 [S119]. 그 첫 수의 앞 두 구는 지식인으로서 겪은 시대의 비극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亂離滾到白頭年,幾合捐生卻未然。 — 黃玹, 「絶命詩 四首」 其一, 『梅泉集』 卷五 [FC08]

“난리 속에 구르고 굴러 백발의 나이에 이르렀으니, 몇 번이나 목숨을 버렸어야 마땅했건만 미처 그러지 못하였네.”


한국 한시의 언어적 조건과 중국 시와의 다른 점

한국 한시와 중국 시의 관계를 살필 때는 두 문학이 공유한 ‘보편적 형식’과 한국 한시만이 지닌 ‘특수한 언어·역사적 조건’을 균형 있게 함께 보아야 한다 [S02, S03, S04].

첫째, 시형과 문어 규범의 측면에서 한국 한시는 중국 고전시의 유산을 깊이 공유했다 [S02, S04]. 고려와 조선의 시인들은 『시경』·『초사』에서 당·송·명·청에 이르는 중국 시집과 시론서를 읽으며 오언·칠언의 구절 마디, 『평수운』(및 조선 후기 정조의 명으로 이덕무 등이 편찬한 『규장전운·奎章全韻』 [FC05])의 106운 압운 체계, 그리고 근체시의 평측·점대·대우 규범을 치밀하게 지켰다 [S02, S04, S21]. 이 공통의 문법 덕분에 신라의 최치원부터 고려의 이제현, 조선의 허난설헌과 사가시인·김정희에 이르기까지 한국 시인의 작품은 통역 없이도 동아시아 문인 사회에서 즉각 읽히고 비평될 수 있었다 [S15, S24, S31, S36, S127].

둘째, 그러나 그 형식 안에 담긴 공간과 역사의 결은 중국 시와 뚜렷이 달랐다 [S02, S03, S124]. 한국 시인들이 읊은 산하(山河)는 황하나 장강이 아니라 대동강과 예성강, 한강과 금강산, 지리산과 탐진의 바다였으며, 시를 추동한 현실 역시 무신정변과 몽골 침입,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실학의 토지 개혁론과 개항기의 국권 상실이라는 한국사의 구체적 현장이었다 [S02, S03, S32, S119]. 나아가 이제현과 신위의 「소악부」나 정약용의 「탐진촌요」처럼 우리말 민요와 판소리, 세시풍속을 한시 양식 속으로 끌어들인 작업은 한국 한시 고유의 장르적 변주였다 [S02, S32, S33, S127].

셋째, 언어와 소리의 작동 방식에서도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 [S02, S05, S34, S35]. 중국 시인에게 한시는 성조를 지닌 모어(비록 문어와 당대 구어의 괴리는 있었으나 같은 한어 체계)로 짓는 시였다. 반면 한국 시인들에게 일상의 모어는 주어-목적어-서술어 어순의 한국어였고, 시의 언어는 주어-서술어-목적어 어순의 한문이었다 [S02, S03]. 더욱이 운과 평측에서 살펴보았듯 한국어 한자음은 중고음의 입성 받침(‘ㄱ·ㄹ·ㅂ’)은 잘 보존했으나 16세기 후반 이후 성조의 높낮이(방점)를 잃어버렸다 [S05, S34, S35]. 따라서 한국 시인들은 지면 위에서 운서와 입성 받침 규칙을 통해 중고음 기반의 평측과 압운을 완벽하게 설계하면서도, 실제로 입으로 소리 내어 읽을 때는 한국어 한자음과 현토(懸吐), 그리고 한국 특유의 가락(시창·음영)으로 이를 향유했다 [S02, S05, S35]. 서거정이 『동문선서』에서 “우리나라의 글(我國之文)”이라 부른 까닭이 바로 이 언어적·역사적 독자성에 있다 [S124].

시대별 주요 한국 한시 시인과 사이트 연결 일람

시대시인(시인 페이지 연결)생몰 연대주요 문집·시화 및 문학사적 위치대표작 및 사이트 작품 연결
삼국(고구려)을지문덕(乙支文德)7세기 초 활동『삼국사기』 권44 열전 전승「증수우익위대장군우중문」
통일신라최치원(崔致遠)857–미상당 빈공과 급제, 『계원필경집』「추야우중(秋夜雨中)」, 「우흥(寓興)」
고려 중기정지상(鄭知常)미상–1135고려 서정시와 절구·율시의 정점「송인(送人)」, 「장원정(長源亭)」
고려 무신기이인로(李仁老)1152–1220『은대집』, 한국 최초 시화집 『파한집』「산거(山居)」, 「죽취일이죽」
고려 무신기최자(崔滋)1188–1260『파한집』을 보충한 시화집 『보한집』(1254)시인 페이지 연결
고려 무신기이규보(李奎報)1168–1241『동국이상국전집』, 장편 서사시 「동명왕편」「강상효우」, 「산석영정중월 기이」
고려 후기이제현(李齊賢)1287–1367『익재집』, 고려속요를 한역한 「소악부」「소악부(小樂府)」, 「제장안역려」
조선 전기서거정(徐居正)1420–1488『동인시화』(1474), 『동문선』(1478) 편찬「송도회고(松都懷古)」, 「조조(早朝)」
조선 전기김시습(金時習)1435–1493『매월당집』, 방외인 유랑 문학「숙산촌(宿山村)」
조선 중기최경창(崔慶昌)1539–1583삼당시인, 『고죽유고』「삼청동구점(三淸洞口占)」
조선 중기백광훈(白光勳)1537–1582삼당시인, 『옥봉시집』「홍경사(弘慶寺)」
조선 중기이달(李達)생몰 미상삼당시인, 『손곡시집』「채릉곡(采菱曲)」
조선 중기권필(權韠)1569–1612목릉 시단의 대표 시인, 『석주집』「춘궁사」, 「투구행」
조선 중기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난설헌집』(1608), 「유선사」「춘우(春雨)」, 「빈녀음 기일」
조선 중기이옥봉(李玉峯)생몰 미상『옥봉집』(『가림세고』 수록 32편)「추한(秋恨)」, 「규정(閨情)」
조선 중기황진이(黃眞伊)16세기 활동개성 기녀 출신 시인, 후대 시화 전승시인 페이지 연결
조선 후기박지원(朴趾源)1737–1805북학파 문학, 『열하일기』시인 페이지 연결
조선 후기이덕무(李德懋)1741–1793사가시인, 『한객건연집』(1777)「논시(論詩)」, 「추안(秋雁)」
조선 후기정약용(丁若鏞)1762–1836실학 사상과 조선풍 사회시「타맥행(打麥行)」, 「탐진촌요 기일」
조선 후기신위(申緯) · 김정희(金正喜)1769–1847 / 1786–1856「동인논시」·「소악부」 / 청 학예 교류·금석학각 시인 페이지 연결
개항기황현(黃玹)1855–1910『매천시집』, 『매천야록』「절명시 사수(絶命詩 四首)」

출처